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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저녁은 다 지나가버렸고, 정우는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출국. 한 시간이라도 연주와 같이 있지 않으면, 그녀와 대화를 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물에 금가루를 떠내려보내는 것 같았다.

 

뒤척거리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정우는 다시 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지만 연주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뭔가 불안한 마음에 정우는 바로 은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은주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은주씨. 저 정우입니다.”

 

“네. 정우씨. 무슨 일이에요?”

 

“연주씨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어제 저녁부터 전화하고 문자 보냈는데 아무 답장이 없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그래요? 연주가 왜 전화를 안 받을까? 이상하다아~”

 

은주가 말꼬리를 길게 빼며 말했다. 정우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글쎄요오오. 무슨 일이 있으려나아?”

 

“은주씨 말투가 왜..... 걱정 안 되세요?”

 

“뭐 연주가 어린애도 아니고 잘 있겠죠. 뭐 살다보면 전화 안 받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오?”

 

뭐지? 정우는 은주의 이상한 반응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술이라도 마신 걸까? 정우는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으세요? 은주씨.”

 

“어머. 정말.... 정우씨. 내 목소리도 몰라요?”

 

아? 뭐라고?

 

“연주씨?”

 

“너무한다, 정우씨. 내 목소리도 모르고. 실망인데요?”

 

“아, 언니랑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서 헷갈렸어요. 설마 했죠. 연락 안 되서 얼마나 놀랬는데.”

 

“응. 그래서 용서 해줄게요. 목소리에 걱정이 넘쳐 흘러서 나 기분 정말 좋았거든요.”

 

연주가 귀엽게 흥흥 거렸고 정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닭살이라며 대패를 가져와 밀어야 한다느니, 닭은 솥에 넣고 튀겨야 한다느니 하는 은주의 살벌한 농담이 들려왔다.

 

“연주씨 전호 안 되요?”

 

“아, 저 어제 전화기 떨어뜨려서 액정이 깨졌어요. 그래서 수리 맡겨 놨거든요.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번 흠흠 거린 뒤 말했다.

 

“연주씨.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저 바빠요.”

 

“아, 그래요? 내일 출국이라... 오늘 꼭 만나고 싶었는데.”

 

“흐흐흐. 놀리니까 재밌어요.”

 

“아, 뭐에요? 그럼 시간 되는 거죠?”

 

연주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재밌다, 정우씨. 왜 이렇게 나한테 쩔쩔매요? 원래 그랬었나?”

 

내가 그랬나? 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대답에 대한 답은 너무나 단순명료했다.

 

“내가 연주씨 사랑하니까요.”

 

누구나 어쩌면 쉽게 하는 말인데... 이 말이 이렇게 듣기 좋은 적이 있었을까? 연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기분 좋아요. 그 말 들으니까. 언제 만날까요?”

 

“7시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제가 데리러 가면 되죠?”

 

조금은 민망한 상황에 정우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남자가 원래 데리러 가야 뭔가 모양새가 사는데... 

 

“이젠 일산이 아니라 좀 멀어서... 미안하네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나 그럼 서운해요. 정우씨 만나러 가는 건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에요. 나 때문에 한국까지 온 사람인데.”

 

“자꾸 사랑스럽게 말해서 어쩌지... 큰일이네요.”

 

연주가 웃음을 터트렸고, 정우 역시 웃었다. 이렇게 이야기만 해도 행복한데.. 만나면 더 행복하고.. 계속 함께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너무 행복해서 도리어 두려울 지경인 정우였다.

 

통화를 마치고 정우는 옷을 갈아입고 강남 쪽으로 이동했다. 주문한 물건이 준비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문자가 왔기 때문이다. 정우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스스로 들뜬 기분을 감당할 수 없는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웃게 되고 미소가 떠올랐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이 그런 정우를 흘깃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는 지하철 의자에 기대어 승객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보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정우의 눈에 승객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행복해 보였다. 아무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그들의 모습이었지만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 이번 내리실 역은 강남. 강남 역입니다.

 

행복한 생각에 젖어있던 정우는 안내방송을 듣고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붐비는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역을 빠져나와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화장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냐?”

 

은주가 연주 뒤에 서서 핀잔조로 말했지만 연주는 언니의 말도 잘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머리만 1시간을 만졌고, 화장도 거의 1시간째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연주는 여느 때보다 훨씬 공을 들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 나 화장 잘 먹은 거 같애?”

 

“정우씨가 너 화장 안 한 게 더 예쁘다 그랬다며?”

 

“그렇기는 한데. 아, 몰라. 봐봐. 제대로 됐어?”

 

“인상 쓰지마. 눈썹이랑 엉망된다.”

 

은주는 화장을 봐주는 대신 연주를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미소와 염려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언니?”

 

“연주야. 우리 예쁜 동생아.”

 

“뭐야, 갑자기?”

 

“네가 이렇게 행복해하니까... 언니는 너무 좋다. 마음도 놓이고.”

 

연주는 말없이 거울 속의 자신과 언니를 바라보았다.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 이렇게 웃는구나..... 이렇게 웃어보는 게 정말 얼마만일까?

 

혁수와의 13년 동안의 삶에 미소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웃는다. 공연을 할 때나 효은이를 대할 때나 연주는 잘 웃는 편이었다. 도리어 연주가 화내는 걸 보는 게 한강에서 사금캐기 보다 더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웃어도 마음이 웃지 못하면 정말로 웃는 게 아니다. 연주의 마음에는 늘 무거운 돌덩어리 같은 짐이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효은이를 보면 그래도 기쁘다가도 혁수와의 현실로 돌아오면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과 불안함, 그리고 그걸 애써 외면하면서, 그를 사랑하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과 억지로 짓는 미소들.

연주의 삶은 그러했다.

 

“언니야. 고마워.”

 

“내가 한게 뭐가 있다고. 결국 네가 결정하고 네가 네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건데. 정말 이혼 건만 빨리 잘 마무리 되면 좋겠다. 엄마도 잘 이해해줘서 천만다행이고.. 무엇보다 효은이가 그리 생각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다행이야.”

 

“다 컸더라. 이제 6학년인데.”

 

“요즘 애들 사춘기도 빨리 오고 그래서 그런가. 그래도 울 연주가 딸래미 하나 잘 키웠네. 엄마도 위해주고.”

 

연주가 자신의 가슴께에 있는 은주의 손을 잡았다. 쌍둥이인데도 체질은 다르다. 늘 손이 차가운 자신에 비해 언니의 손은 따뜻하다. 그래서 어릴 때 같은 방을 쓸 때면 늘 언니의 손을 잡고 잠들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언니. 근데 손이 어디로 자꾸 내려와?”

 

연주의 말에 은주는 장난스럽게 손을 슬금슬금 내려 연주의 가슴을 가볍게 잡았다.

 

“언니, 손 떼시지?”

 

“싫은데? 오랜만에 연주 찌찌 만져보자. 흐흐흐.”

 

“미쳤다, 진짜. 이거 언니꺼 아니거든.”

 

“그럼 누구 껀데?”

 

“정우씨.”

 

“아아아아! 소름! 저리 가! 진짜 닭살이다, 정말. 언니 앞에서 그러고 싶어? 으아아아아~”

 

은주가 못 만질 거라도 만졌다는 듯이 최대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주에게서 떨어졌고, 연주는 그런 은주를 거울을 통해 보며 쿡쿡 웃었다.

 

“왜 사실을 말한 건데.”

 

“어우, 닭살. 난 진태씨가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는 이야기 안 해봤는데. 너는 그런 말 잘도 한다. 나는 막 소름 돋아.”

 

“언니도 해 봐. 형부가 엄청 좋아할 걸? 야한 속옷 입고 하면.”

 

“싫어어~ 나 거실에 가 있을래. 너랑 같이 있으면 전염될 거 같아.”

 

은주가 몸서리를 치며 거실로 나갔다. 은주는 웃으며 입에 가볍게 티슈를 무는 것으로 화장을 마무리 했다. 그리고 어제 받았던 택배 박스를 슬그머니 침대 밑에서 꺼냈다. 며칠 전 정우를 만날 때 입고 싶어서 주문했던 건데 배송이 빨리 오지 않는 바람에 입지 못했던 그것. 연주는 입고 있던 속옷을 벗어버리고 택배 박스에서 꺼낸 속옷을 몸에 걸쳐보았다.

 

‘야하다. 정말.’

 

자신이 걸쳐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야한 색상과 디자인은 속옷. 연주는 한참을 자신을 쳐다보다가 속옷을 입어보았다. 쇼핑몰 홈페이지의 모델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이 입어도 꽤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과 엉덩이 옆선이 강조된, 망사를 겸비한 속옷.

 

‘정우씨가 좋아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하지만 나도 입어보고 싶었어. 이런 거.......’

 

혁수와의 관계에선 이런 속옷을 입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혁수는 자신과의 관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연주는 조금 짧은 원피스를 입는 것으로 세팅을 완료했다. 그리고 택배 박스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은주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골프 채널에 한참 집중하고 있었다. 연주가 나오자 흘깃 그녀를 보았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우리 동생, 오늘 진짜 예쁘다. 정우씨 계탔네.”

 

“뭐래. 나 원래 예뻐.”

 

“응. 그래. 안녕.”

 

괜히 심통과 심드렁. 연주는 웃으며 언니에게 들고 있던 택배 박스를 건네주었다. 은주는 택배 박스가 연주를 번갈아 보며 뭐냐고 눈으로 물었고, 연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물. 내 꺼 사면서 언니꺼도 샀어. 사이즈도 비슷하니까 맞을 것 같아서.”

 

“어머, 우리 동생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

 

“응. 그래야 언니 동생이지. 나 나갈게.”

 

“그래, 잘 다녀와. 집에 들어올 거야?”

 

“아마 안 들어올 거 같은데......”

 

“효은이한테 뭐라고 이야기하지?”

 

연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한테 갔다고 해줄래?”

 

“언니를 아주 거짓말장이를 만들어라. 갔다 와.”

 

“응. 언니. 그거 형부가 엄청 좋아할 거야.”

 

연주는 그 말을 끝으로 현관을 나섰다. 그제서야 은주는 박스 안에 있는 포장된 물건을 꺼냈다. 겉보기에는 알 수 없는 정체.

비닐을 다 풀어서 눈 앞에 펼쳐진 속옷을 본 은주는 연주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라올랐다. 특히나 은밀한 부분이 옅은 망사 처리된 것을 본 은주는 이미 사라져 버린 연주를 향해 소리쳤다.

 

“야! 하연주우우우우!”

 

****

 

출근해서 바로 글부터 올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손님(bc8c0) 2020.06.25 07:14
    오우 딱 글 올라오는 타이밍ㅋㅋ 감사요~~~
  • 제레미 2020.06.25 08:29
    좋습니다...좋아요...ㅎㅎㅎ
  • 손님(cf1a7) 2020.06.25 08:30
    ㅋㅋㅋ 하루의 시작을 형 글 보면서 하고있어요 ! 형 최고야 ㅋ
  • 손님(ef996) 2020.06.25 08:48
    잘읽고 있습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손님(64c10) 2020.06.25 09:16
    잘 봤습니다 작가님 좋은하루 되세요 ^^b
  • minizi 2020.06.25 09:43
    잘 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
  • 손님(b4107) 2020.06.25 10:55
    오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분좋게 잠들겠습니다. BsAs.
  • 손님(c84b2) 2020.06.25 18:09
    정말잘읽고있어요 해피엔딩으로끝나겠죠??ㅜㅜ
  • 손님(39855) 2020.06.25 18:54
    글에서 연주씨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진심으로 행복해 하시는 게 보이네요. 이 행복이 결말까지 그래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손님(e6d76) 2020.06.26 16:16
    정우 작가님 잘봤습니다 글 쓰시느라 본업일 하시느라 바쁘실텐데 고맙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 도토리칼국수 2020.06.26 17:32
    뒷내용이 없네요 ㅠ 기다리겠습니다.
  • 손님(6a2bf) 2020.06.26 21:07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 손님(ec232) 2020.06.30 18:34
    다음글은 언제 올리시나요?
  • 손님(b2606) 2020.06.30 21:52
    형님 ㅜㅜ
  • 손님(be3d5) 2020.07.03 09:20
    조용
  • 손님(6f38f) 24 시간 전
    다음 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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