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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편입니다. 댓글도 많이 달아주시고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인하고 한 이야기 적어달라고 하셨는데... 사실 많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래도 해외에 거주하다 보니 여친들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그러다 보니 스토리가 너무 길어서요. 그걸 어디를 어떻게 자르고 적어야 할지 아직 엄두가 안나서 시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났던 여자들 정리중.... 쿨럭.... 정리가 되고 하면 한 번 하나하나 써 보겠습니다.

 

처진 어깨를 동무삼아 나는 매장을 다시 나왔다. 저녁도 못 먹었고… 나는 푸드 코트에서 순대라도 사야지 하는 마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기분이 씁쓸했다.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나는 푸드 코트로 방향을 틀었다. 순대가 3인분 사서 혼자 다 먹어야지. 멍충아 멍충아 하면서. 

그리고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 유채화. 푸드 코트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꽃이 거기에 피어 있었다. 청바지에 가로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고,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검정색 작은 백팩을 맨 그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빨간 떡볶이. 떡볶이가 부럽기도 처음이다. 

  

"매니저님?" 

  

"음? 압.. 응. 뎡우야." 

  

"씹고 말해요." 

  

나는 킥킥거렸고, 그녀는 오뎅 국물을 마시다가 아뜨뜨 거렸다. 귀엽다, 이 여자. 

  

"뭐해요, 여기서?" 

  

"나 저녁. 나 떡뽁이 좋아해서." 

  

"그럼 오후 근무 마치면 맨날 여기 와요?" 

  

"응. 몰랐지? 흐흐. 난 떡볶이가 너무 좋아. 너도 먹을래?" 

  

그녀가 자기가 쓰던 이쑤시개에 떡볶이를 하나 꽂아 내게로 가져왔다. 어어어? 이러지 마요, 진짜. 살인미수로 고소할거야… 

  

"앉아, 여기." 

  

"네." 

  

"뭐 먹을래?" 

  

"전 순대요." 

  

"그래? 해외에도 순대가 있어?" 

  

"있긴 한데 잘 못 먹어요. 한국처럼 맛있지도 않고." 

  

그녀가 웃었다. 

  

"그래? 내가 그럼 오늘 실컷 사줄게. 늘 도와줘서 고마워." 

  

"그럼 잘 먹을게요." 

  

우린 같이 앉아서 분식을 먹었다. 그녀의 작은 입속으로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나는 안 보는 척하고 다 봤다. 작은 입술이 오물조물 하면서 음식을 먹는데 왜 저렇게 예쁜 거야? 네, 여러분 저 콩깍지 씌었어요 ㅠ.ㅠ 근데 예쁜 걸 어쩌란 말입니까? 

  

[콩깍지까 씌어보지 않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건 더러운 변명입니드와!!!!!! 

  

이야기가 또 샜다. 그녀와 음식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내게 여러가지 질문을 했다. 해외에서의 생활 이야기 등등. 유학 초반에 어려웠던 이야기를 했을 때는 그녀도 공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 초반이 많이 힘들지. 나도 그랬어." 

  

"매니저님 유학 했었어요?" 

  

"아 나 필리핀에서 2년 정도. 고등학교 때. 힘들었어. 언어도 모르고, 막 따갈따갈 거리는데." 

  

"그쵸. 못 알아들으니까 싸우지도 못하고." 

  

"맞아. 알고 나면 싸우는데." 

  

그녀가 웃으며 내게 티슈를 건넸다. 나는 입가를 살짝 닦고 말했다. 

  

"내일은 언제 근무에요?" 

  

"나 내일 업근무." 

  

"오, 그럼 내일 같이 일하겠네요?" 

  

"그렇겠네. 내일 아침도 잘 부탁할게." 

  

"맛있는 거 또 사주면 생각해볼게요."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식사를 마쳤다. 그녀가 사는 동네가 조금 멀었기에 나는 그녀를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다 주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이렇게 그녀와 걷고 있으니 마치 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혼자만의 착각이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버스가 늦게 오면 좋겠다. 하지만 이럴 때는 꼭 버스가 빨리 오더라. 정류장에 도착한지 5분도 안 되어 버스가 도착했다. 어떻게 하지? 

  

"어. 매니저님 이 버스 타요?" 

  

"응. 너는?" 

  

"저도요. 같이 타요 그럼." 

  

물론 아니다. 우리 집은 매장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였고 방향은 반대였으니까. 그녀는 혼자 타고 가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다.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만석이었고 우리는 서서 가야했다.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기둥을 내 오른손으로 잡았다. 마치 뒤에서 아무도 그녀를 건드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나 막 냄새나고 그런 건 아니겠지? 

같이 서서 그녀와 이야기했다. 그녀에게서 그녀의 화장품 냄새, 그리고 롯데리아 매장에서 맡을 수 있는 음식 냄새, 기름냄새가 섞여 났다. 향기롭다. 좋다.. 그냥 다 좋아…. 

  

"나 여기 내려. 너도 잘 들어가." 

  

"네. 내일 아침에 봐요." 

  

"응. 고마워. 잘 자구." 

  

그녀는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움직였고 그녀는 멀어져 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언제쯤 내려야 하지……. 

 

밤 11시 20분. 집에 와서 게임을 하다가 슬슬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 업근무니까 집에서 늦어도 7시30분에는 나가야한다. 늦게 도착하는 건 내가 용납이 안되니까. 내일 오전 근무가 연희맴이니까 그래도 먼저 가서 문 열어야할지도,…. 

그때 내 전화기 벨이 울렸다. 

  

"엥. 연희맴? 이 시간에 왠일이에요?" 

  

"어, 정우야. 너 내일 아침에 5시30분까지 나올 수 있어." 

  

"엑? 왜요?" 

  

"내일 아침 8시30분까지 새우버거 600개 만들어야 돼. 내일 소풍가는 학교에서 단체 오더를 넣어서." 

  

600개….. 음. 죽었다. 

  

"갈게요. 저 그럼 지금 잡니다." 

  

"어. 내일 늦지 말고 와줘."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자야 돼, 자야 돼. 

다섯시가 되기 전에 깼다. 600개라. 벌써 한숨부터 나온다. 왜? 만드는 게 어려워서? 아니다. 600개를 만든다고 만들다 보면 분명 20개 정도는 남는다. 그건 어떻게 하냐고? 먹어야지…. 롯데리아 햄버거의 보관시간은 길지 않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많이 남으면 폐기를 못하니까… 보통은 메이트들이 먹곤 했다. 오늘 입에서 새우 냄새나게 먹겠구만.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난 매장에 도착했다. 매장엔 벌써 불이 켜져 있었고, 연희맴은 안에서 벌써 패티를 튀기고 있었다. 

  

"왔어? 일단 레터스부터 씻어줘.' 

  

"예입." 

  

난 싱크로 갔다. 거기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 그녀였다. 

  

"매니저님도 일찍 왔어요?" 

  

"응. 연희 매니저님이 연락하셔서 일찍 오라고 하셔서." 

  

"택시 타고 온 거에요?" 

  

"응." 

  

새우버거 최소 스무 개는 택시에 버리셨군요. 그녀는 레터스를 씻고 있었고, 나는 갓 A메이트를 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레터스를 씻어놓고 그다음 패티 튀기는 걸 도왔다. 빨리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는 빵을 구워야 하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드레싱을 시작한다. 연희맴은 계속 패티를 튀기고 나는 드레싱을 하고 그녀는 랩핑을 해야한다. 

세 명이서 600개를 만드는 게 가능하냐고? 가능하다. 나랑 연희맴 둘이서 500개도 거뜬히 만든 적이 여러번이다. 특히 학생회장 선거나 할 때면 햄버거 주문이 폭주한다. 새우버거 판촉하면 더 많이 주문이 들어온다. 

  

나와 연희맴의 속도는 좋았다. 늘 하던 일이니까. 그런데 그녀를 보니 여전히 허둥지둥 대고 있다. 래핑 속도가 드레싱 속도를 쫒아오지 못하고 있다. 저러면 박살날 건데…. 나는 드레싱을 하다가 랩핑까지 붙어서 같이 도와주었다. 손에서 새우 패티 냄세, 그리고 타르타르 소스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리고 7시 45분. 우리는 육백 개 오더를 마쳤다, 박스에 포장까지 끝내고 배달원에게 물건을 맡기고 나서야 모든 일이 정리됐다. 난 의자에 앉아 연희맴에게 물었다. 

  

"근데 미정이 왜 안 와요?" 

  

"미정이 어제 집에 가다 다리 접질러서 병원 갔대. 아마 며칠 못 나올 거야." 

  

"와.. 타이밍 예술." 

  

"수고했어. 새우버거 먹을래?" 

  

"다른 거 안 줄 거잖아요." 

  

"도시락 세트 하나 먹어." 

  

"아뇨. 새우버거 먹을게요. 안 먹으면 버리는데." 

  

"그럼 떙큐지. 채화맴도 가서 같이 드세요." 

  

"연희 매니저님은 안 드세요?" 

  

"전 여기서 먹을게요. 같이 휴게실 가서 드시고 오세요. 8시 40분까지 와요." 

  

나와 그녀는 햄버거와 콜라를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세 시간을 꼬박 서 있었던 터라 나는 다리가 제법 아팠다. 뒤에 따라오는 그녀를 흘깃 보니 그녀도 중간 중간 종아리를 툭툭 쳤다. 

휴게실 테이블에 햄버거와 콜라를 내려놓았다. 새우버거 6개. 음…. 어떻게 다 먹지? 

  

"힘들었죠? 매니저님." 

  

"아 응. 이런 건 처음이라서. 이렇게 많이도 금방 만드는구나." 

  

"우린 단체 오더가 자주 들어와서요. 저는 처음이 아니니까. 드세요." 

  

"응. 너도 먹어." 

  

둘 밖에 없는 휴게실. 조용히 햄버거를 씹는 오물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콜라가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다. 뭐라고 말을 해야하는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둘이 같이 있던 적은 있지만 이런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만 있는 건 처음이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좁고 가까운 공간. 난 새우버거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날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또 먹어?" 

  

"네?" 

  

"너 네 개째 먹는 건데?" 

  

"아. 아 네. 저 많이 먹어요." 

  

"대식가구나. 난 하나만 먹어도 배부른데." 

  

또 말이 없어졌다. 싸늘하다…. 가슴에 햄버거가 빽빽히 쌓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먹는 게 소화보다 빠르니까(?). 연희맴에게 새우버거 하나. 채화맴에게도 새우버거 하나. 나한테 새우버거 네 개. 

  

또 이야기가 샜다. 요실금인가 보다. 

  

"나…." 

  

나 뭐라고 할려고 저 말을 꺼낸거지? 내가 입을 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는 모른다. 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나 먼저 갈게요. 준비해야 되서." 

  

"아 응. 그래. 먼저 가." 

  

"다 먹고 천천히 와요, 매니저 님." 

  

아, 진짜 멍청이. 멍충아. 난 자책하며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업근무 준비를 위해 청소하고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그녀도 매장으로 돌아왔고, 우린 함께 일을 했다. 그때 연희맴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아, 맞다. 채화맴. 내일부터는 업근무 나오세요. 미정이가 발목 인대 늘어났다고 연락와서 내일부터 못 나온데요. 매니저님이 내일부터 아침에 와서 2시까지 해주세요." 

  

미정아! 고마워!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이 아니지만….. 내일부터 그녀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 

아침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우린 둘 다 2시에 근무를 마쳤다. 그녀는 약속이 있다며 빨리 옷을 갈아입고 매장을 빠져나갔다. 아쉬웠다.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는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 

  

저녁 과외를 갔다. 그날 저녁엔 그나마 말을 잘 듣던 여학생 과외였다. 내가 수업하면서 굉장히 기분 좋아보였나보다. 학생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튼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쌤 좋은 일 있어요?" 

  

"왜?" 

  

"아까부터 계속 실실거리길래." 

  

"응. 좋은 일 있지. 있어." 

  

다음날 아침. 그녀가 웃는 낯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녀의 연수기간은 이미 열흘도 넘게 지났다. 얼마나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짧아도 그녀와 있으니까 기쁘고 행복하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일하면서 우리 자연스럽게 대화를 많이 했고, 또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양파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불고기 버거를 먹을 때면 일부러 양파를 빼고 레터스를 많이 넣어서 만들어주었다. 작은 일이었는데 그녀가 무척 고마워했다. 

  

이틀 정도 같이 일했을 때, 연희맴이 우리 두 사람을 불렀다. 

  

"채화맴이라 정우. 내일 두 사람은 같이 좀 할 일이 있어요." 

  

"뭔데요 매니저님?" 

  

"응. 내일 다른 패스트푸드 점포들 방문해서 햄버거도 먹어보고 거기 매니저님들도 만나보고 보고서 쓰는 거야. 채화맴 하는 일인데, 정우 네가 같이 가서 좀 도와주면 좋겠다." 

  

우왕… 둘이 나가라고? 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잘 보일까 싶어 새벽부터 일어나 옷을 뒤졌다. 나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엔 옷을 잘 못 입었다. 그냥 청바지에 티셔츠나 남방이 전부였다. 아침부터 남방을 꺼내서 다리고 지지고 볶고….. 

결국엔 청바지에 하얀 면티, 그리고 가벼운 청남방. 늘 입고 다니는 그 스타일. 난 한숨을 쉬며 집을 나섰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파파이스, 맥도날드, KFC 등 여러 프랜차이즈를 방문해야 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15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냥 흥얼거림이 절로 흘러나온다. 정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 그녀가 눈부신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마치 새하얗게 빛나는 햇살을 뚫고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그녀만이 느리게 움직인다. 소설 쓰고 있네?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진짜 사랑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닐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그 한올 한올(임한올 아님 주의) 빛을 머금은 모습이다. 이러다가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아름답게 그녀는 내 앞에 내려앉았다. 

  

"많이 기다렸어?" 

  

그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일단 침부터 삼켰다. 하늘색 원피스, 그리고 챙이 넓은 모자,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란 리본. 그녀는 모자를 정말 좋아했다. 마치 오래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모습, 그녀는 꼭 그랬다. '로마의 휴일' 이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 등장할 것 같은 그녀다. 

  

"아니요. 금방 왔어요." 

  

"응. 아침은 먹었어?" 

  

"오늘 햄버거에 방문하면서 매장할거잖아요. 그래서 안 먹었죠." 

  

"응? 햄버거에 방문을 해서 매장을 해?" 

  

아… 미친…. 뭐라는 거야, 나? 

  

"아니. 그니까 매장 가면 맛본다고 시식하고 그럴 거잖아요. 그래서 안 먹었어요." 

  

"흐흐. 나도. 그럼 가자." 

  

그녀는 나보다 반보 정도 앞서 갔다. 반걸음 더 나아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싶다. 그래도 될까? 아마 안 되지 않을까? 난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30센치도 안 될 것 같은 거리인데.. 왜 이렇게 멀까… 

우린 이곳 저곳 매장을 방문했다. 시식도 하고 매니저들도 만나고. 그녀는 꼼꼼히 이런저런 정보들을 메모지에 기록했다. 

마지막 매장 방문을 마쳤을 때, 시간은 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다. 그녀도 그런 듯 했다. 이대로 헤어져야 하는 걸까? 

  

"정우야, 고마워. 덕분에 힘들지 않게 잘 했네." 

  

"뭘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런 말 마. 진짜 수고했어." 

  

"이제… 매니저님 어디 가요?" 

  

"나? 난 오후에 할 거 없는데. 너는 어디 가?" 

  

"아, 저도 할 거 없어요." 

  

사실 있다.. 5시30분부터 과외…. 그래도 아직 4시간 남았잖아. 

  

"그래? 그럼 내가 고마운데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은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엥? 지금요? 배 터질 거 같은데. 매니저님은 배고파요?" 

  

"아니. 물도 못 마시겠어. 그럼 뭐 바라는 거 있어?" 

  

뽀뽀해주세요! 아 씨.. 어디서 돌맹이가 날아오냐?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저랑 영화 보실래요?" 

  

"영화? 영화 보고 싶었어?" 

  

네… 매니저님이랑요. 

  

"네. 요즘에 그 영화 재밌다고 하던데. 보셨어요?" 

  

"아니. 나 안 봤어." 

  

난.. 사실 봤다. 그 영화. 

  

"그럼 저 그거 보여주세요." 

  

"그러자 그럼. 지금 영화관 가면 상영시간 맞으려나?" 

  

"저거 인기 많아서 계속 해요. 가요, 지금. 시간 없어요." 

  

난 그렇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발… 그녀가 뿌리치지 않게 해주세요.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녀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잡은 손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런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낮시간이어서인지 극장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동시에 개봉한 여러 영화들이 있어서 관객들도 분산된 터여서인지 우리가 보려던 영화는 관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상영한 기간도 좀 되고 하는데 지금까지 만석이면 말이 안되지. 

표를 끊고 팝콘하고 콜라를 샀다. 내가 산다고 우겼다. 영화표는 그녀가 샀으니까. 영화에서나 보던 그 팝콘 먹다가 손 잡는 그런 우연. 그거라도 만들어보고 싶은 작은 마음이었다. 

  

난 영화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이미 본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지 않은 영화라도 아마 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내 옆에 내 모든 관심을 빼았아간 그녀가 앉아 있으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끊임없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팝콘을 집을 때를 빼면 거의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러다 영화 끝나면 내 눈알이 왼쪽으로 쏠려 있겠다….. 

영화가 중반쯤 지나갔다. 바뀌는 영화 화면에서 비치는 빛에 반사된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변하는 영화관의 빛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팝콘을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팝콘을 그대로 밀어 떨어뜨렸다. 반 넘게 남아있던 팝콘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 어떡해?" 

  

"아. 괜찮아요. 제가 나가서 하나 더 사올게요." 

  

"아냐. 아냐. 괜찮아."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심장 박동수가 점점 올라간다. 영화관 스피커에선 계속 소리가 나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아주 고요한 곳에 나와 그녀만 있는 기분이었다. 

  

"미안. 내가 실수했어. 다 쏟아버렸네." 

  

"그럴 수도 있죠. 다 실수하는데." 

  

내 말에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난 곁눈질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따갑다.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영화 재미 없어?" 

  

"네? 아뇨. 재밌어요. 엄청." 

  

"흐흥. 거짓말. 나 너 때문에 고개도 못 돌리고 계속 화면만 쳐다봤어." 

  

"저 때문에요? 왜요?" 

  

"네가 영화는 안 보고 계속 나만 쳐다보니까. 고개를 돌릴 수가 있어야지." 

  

헉? 알고 있었구나. 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치 나쁜 짓하다가 걸린 기분이랄까? 나는 용기를 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내 눈 앞에 있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보인다. 다가갈까? 아니.. 그러기엔 난 너무 용기가 없다.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두렵다. 

  

"나 좋아해?" 

  

그 말과 함께 내 심장은 멎어버렸다. 마치 귀에 이명이라도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데 보고 있지 않는 것만 같다. 내 입술이 열렸다. 

  

"네. 좋아해요." 

  

"응. 알고 있었어. 너 너무 티나." 

  

"그, 그랬어요?" 

  

그랬구나.  난 모르게 한다고 한 건데. 연애 경험도 제대로 없는 내가 그런 걸 가릴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연희맴이 오늘 누구랑 갈 거냐고 물어보길래 너랑 같이 가고 싶다고 했어." 

  

"정말요?" 

  

"응. 나한테 잘해줘서 고맙고.. 또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서." 

  

"언제부터 알았어요?" 

  

"나 출근한 첫날."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진짜요?" 

  

"응. 내가 어딜 가든 네가 쳐다보는 것 같더라. 솔직히 좀 첨엔 부담되고 무서웠어." 

  

"무서워요?" 

  

"응. 항상 나만 보고 있으니까." 

  

"아. 미안해요. 눈을 뗄 수가 없어서." 

  

그녀가 나를 보면서 귀엽다는 듯이 웃는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우리 매장 사람들 다 알아." 

  

"으잉? 어떻게요?" 

  

"너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다들 알아. 너 감정을 전혀 못 숨기는 거 같아." 

  

"매니저님들도 알아요?" 

  

"아실걸. 대놓고 이야기를 안하시는 것 뿐이지." 

  

그랬구나. 나만 몰랐구나. 

  

"그래서 기다렸어." 

  

"뭐를요?" 

  

"네가 언제 나한테 좋아하냐고 말할까…." 

  

"좋아해요, 매니저님." 

  

"내 이름이 매니저님이야?" 

  

그녀가 킬킬대며 웃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채화 씨. 좋아해요." 

  

"그냥 누나가 더 낫지 않아?" 

  

"아. 네. 누나 좋아해요." 

  

"너 진짜 이럴 때 엄청 진지한 거 같아."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가슴이 요동친다. 안고 싶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힘조절이 되지 않았는지 그녀가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나는 우리 의자 사이에 있던 팔걸이를 밀어올렸다. 이제 우리 둘 사이가 연결되었다. 아무 것도 막는 게 없다. 나는 떨리는 몸으로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그녀가 웃는다. 

  

"왜 이렇게 떨어?" 

  

그녀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안아주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귓가에서 바로 들렸다. 그녀의 원피스 너머로 그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를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이 내게 밀착되어 왔다. 이젠 그녀의 심장이 내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있다. 내 심장이 과부화가 걸린 것에 비해 그녀의 심장은 차분하게 뛰었다. 

  

"여자친구 있을 줄 알았어." 

  

"없어요. 아직 한 번도." 

  

"그럼 내가 처음이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말을 못 꺼내겠다. 그녀가 내 대신 말했다. 

  

"오늘부터 잘 부탁할게, 남자친구씨." 

  

"자, 잘 부탁해요. 누나." 

  

"언제까지 말 높힐래? 이런 것도 알려줘아 돼?" 

  

"아, 응. 아니."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지금의 기억 속에도 눈부신 그녀와의 사랑이. 너무 눈부셔서 내가 다가가면 그 빛 속으로 빨려갈 것 같았던 그녀와의 시작이 그러했다. 시간이 길어도, 아니 짧아도, 그렇게 사랑이었다. 아마도 내가 어느날 재가 되어 없어지는 그날까지 내 기억 속에 남을 그녀와,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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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봐서 저녁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좋은 오후, 좋은 저녁 되세요.
  • 손님(ba15c) 2020.05.22 15:57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소설을 안 쓴지가 하도 오래 되서 모르겠네요 ^^;; 지금 쓰는 거야 원래 있었던 일을 글로 옮긴 거라서 뭐 따로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진 않는데. 소설은 조금 다르니까요. 하지만 감사합니다 ^^
  • 손님(9a534) 2020.05.22 15:57
    설레잖아~ 내 첫사랑생각도 나고
  • 손님(ba15c) 2020.05.22 15:57
    그렇다면 성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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